Chigong story/novel

도시의 폭설 - 한 여자와 손가락이 긴 사내

서 태평 2012. 9. 20. 14:20

도시의 폭설 - 한 여자와 손가락이 긴 사내 ( 출처: http://blog.naver.com/korea1033/140168340356 )

 

전동열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열차가 전 역을 출발했다는 전광판의 안내문도 아직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유예되었던 시간은 절반 이상이 지났을 것이다. 이제 전동열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한 번 환승을 해 도착한다면 얼추 유예되었던 시간과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전동열차는 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는 기다리면 오지 않는 법이다. 아니, 그녀는 열차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폭설에 도시철도는 마비되고, 다른 교통수단들도 마비되고, 그리하여 갇혀버린다면……. 눈에 갇히고 시간에 갇혀버린다면…….

눈은 마구 퍼부어댔다. 요절한 사내의 넋처럼 쏟아졌다. 요절한 사내……. 남편의 죽음에 관한 소식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도시에서 요절한 사내들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남편이 죽었다. 어쩌면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던 그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면에서 좀 높게 떠오른 탓인지 승강장엔 바람이 한 줌씩 불어와 발목이며 목덜미를 휘감고 지나갔다. 그 때마다 눈발도 몇 낱씩 날아들었다. 띄엄띄엄 흩어 선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거나 어깨를 움츠린 채 열차를 기다렸다. 승강장 지붕에는 쌓이는 눈보다도 어둠이 더 무겁게 얹혀갈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 갔다. 전동열차도 연착을 하는가? 어쩌면 정말로 폭설 때문에 두절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승강장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들은 역사(驛舍)의 저 위로부터 이어진 층계를 하나씩 밟아 내려와 서서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그리고 돌아서서 승강장 바깥의 쏟아지는 눈들을 바라보며 열차를 기다렸다.

그렇게 열차를 타려는 승객처럼 층계를 밟아 내려온 사내 하나가 곧장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였다. 형광불빛을 비스듬히 받아서인지 얼굴빛이 파리해보였다.

“괜찮아?”

그가 물었다.

“뭐가?”

“걱정이 돼서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와봤는데 아직 열차가 안 들어왔나?”

“곧 오겠지.”

다시 시계를 보았다. 사실상 몇 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그는 아마 유료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차를 끄집어 내 달리다가 전철역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왔을 것이다.

“내 차로 가지?”

“아냐. 전철이 나아.”

“할 말이 없군.”

“무슨 말이 필요해. 아무 말 안 해도 돼. …… 그런데 이런 생각을 했어. 전동열차가 와도 안 타고 그냥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열차가 떠난 빈 승강장에 남고 또 남고…. 막차가 지날 때까지 말이야. 물론 생각뿐인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러지도 못하게 됐어. 이렇게 네가 왔으므로.”

그녀는 슬몃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뒷모습이 위태해 보이더라니.”

“내가? 아닌데…….”

다시 슬몃 웃음을 흘렸다. 한 줌 바람이 불면서 허연 입김이 날려 허공에 사라졌다. 밀려오는 바람 저쪽 끝에 열차가 나타나 달려왔다. 열차가 내쏘는 불빛 속에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새카만 나비 떼였다.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멈추기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출입문이 열려서야 ‘갈께’ 그 한 마디를 건네고는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뒤 출입문이 닫히고 열차는 출발했다.

뒤로 밀리는 빈 승강장엔 그녀 대신 그가 남았다.

손가락이 긴 사내 하나. 열차가 떠나면서 남기고 간 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사내는 그 긴 손가락을 머리칼 속에 찔러 넣었다.

<진행 중인 작품에서>

 

   

< 그림: 김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