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김용옥) "요한복음 강해"를 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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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형식 목사, 작가, 한국기독교목회자협회 대표, 한국학술재단 학술연구자, 정책비평가, 뉴스타운 논설위원. 출처: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2075§ion=sc7 |
도올의 신학적 좌소와 기독교적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 도올이 요한복음을 강해한 내용의 책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 이점은 반드시 짚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가 책으로 발표되고 난 후, 한기총을 비롯한 정통교단의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책의 내용을 문제 삼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단연구가로서 나름대로의 책임의식을 느끼며 관련기사와 문제의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1. 첫 번째 이유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 도올 선생의 작품에 접근하기 전에 다음의 기본적인 상식에 준하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습니다. 2. 두 번째 이유- 도올의 이원론 사상 도올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도올의 입에나온 말과 주장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입증해 줍니다. 과연 기독교단체들은 도올의 영양가 없는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도올의 사상적 정체는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도올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도올은 이단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도올의 이단성은 도와 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미 판정이 난 사항입니다. 이제 그의 사상과 그의 독특한 신학의 정체를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올은 자신이 강해하고 있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분리합니다. 먼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합니다. 그래서 이원론입니다. 분리해 놓고 구약은 유대인의 경전일 뿐이라는 말로 구약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이어 기독교는 구약의 율법주의를 부정하고 탄생된 새로운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기독교가 구약을 강조한다면 이는 사기 행위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도올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주의적인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가셨고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기독교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신약에서 역사상의 예수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예수 그리스도를 또 분리합니다. 전형적인 이원론자입니다. 육신의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성격을 규정하여 특성을 따로 분리해냅니다. 육신의 신분으로서 교훈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로서 교훈하신 말씀을 자신의 잣대로 분리해 냅니다. 그 모양이 제법 진지해 보입니다.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난자의 핵을 분리해내는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는 생명공학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도올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난자의 핵을 분리하는 것은 자신이 유추하여 내린 결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도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각각의 신분에서 교훈되어진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양자를 서로 다른 핵에 주입시켜 하나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정통교회가 주장해 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히 강조해 왔던 “믿음”이라는 핵을 빼고 도올이 주장하고 있는 “이해”라는 핵으로 치환시키기 위한 작업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철학으로 대체하는 작업이지요.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때에 주어지는 의인의 칭의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다른 말로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도올이 기독교의 본질인 믿음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라는 단어를 밀어 넣으니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죽은 생명체가 세포분열을 일으킵니다. 얼마 후 고사할 세포분열입니다. 테라토마 검증 바로 직전인 콜로이 상태까지는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대단한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요한복음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도올은 신앙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에 치를 떱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믿음을 주장하는 원인은 교회를 크게 짓고자 하는 목사들의 탐욕일 뿐,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크게 지으라고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부수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도올선생이 정의하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답이 아니지요. 1) 기독교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은 뭔가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걸 하나님이라고 하든, 열반이라고 하든, 그런 초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겸손을 배우게 된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열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독교는 로마 황제의 공인을 받은 이후 인류 역사에서 너무 많은 증오를 가르쳐 왔다. 수많은 전쟁이 종교로 인해 일어났다. 기독교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증오를 뿌려선 안 된다." 도올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절대한계에서 종교의 역할이 개입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든 하나님이든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고 말합니다. 겸손을 말하는 사람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이후에 기독교로 인하여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질문과는 전혀 안 맞는 답인데요. 이는 도올이 기독교에 대해 욕을 하고 싶어 한다는 평소의 심중이 튀어 나오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욕을 하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대놓고 욕은 못하겠고 하여 신학자 목회자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기독교를 욕하는 것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도올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어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지,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울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2) 두 권의 기독교 저서를 통해 "성서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무슨 뜻인가. "기독교에 대해선 역사적으로 무수한 논쟁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빙자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등치는 사교(邪敎)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모든 기독교 논쟁의 기준이 성서여야 한다는 뜻이다. 성서중에서도 예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신약의 복음서 위주여야 한다. 교회의 이권에 의해 생겨난 담론들을 마치 성서처럼 잘못 파악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도올 선생과 똑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투만입니다. 불트만은 신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합니다. 불트만은 신약 성경 내용 중에서 신화적인 요소와 비신화적인 요소, 묵시록적 요소, 비유적 요소가 혼재하며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취합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를 정확히 구분해 내는 작업이 현대 신학자들의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비과학적이며 신화적인 요소, 즉 상식에 어긋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일부 과장된 내용임으로 성경의 내용에서 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논리가 맞는다는 겁니다. 에밀 부른너는 기독교 철학, ‘참된 비판적 사고’에서 지적하기를, “기독교 철학은 기독자가 사고하기를 그칠 수 없고 그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필연적이다. 다만 기독교 철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가 아니라 자기 영화성을 추구하는 이성주의의 오만이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도올은 飛躍(비약)을 중요 단어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대중의 종교가 되려면 맹종적인 믿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비약해야 한다는 겁니다. 도올이 비약을 통해 이해를 강조하면서 신약만을 성경으로 보고 있다는 발언에는 중대한 맹점과 모순이 있습니다. 이는 도올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신약은 대체적으로 이해정도는 할 수 있으나 구약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역으로 실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가 구약을 유대교의 경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중에 입맛대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고가 아닙니다. 두 가지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져 있는데 한 가지만 취한다고 한다면 뿌리에서 이탈되고 마는 것이지요. 도올의 주장은 몇 개의 중대한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분석해 보면 도올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또 도올이 기독교 관련 책을 쓴 것은 기독교, 특히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학자적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지 무슨 대단한 진리를 발견하고 쓴 책이 아닙니다.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 한권을 쓰는데 무려 358권의 참고서적을 참고 인용했다고 자랑이 늘어집니다. 역으로 보면 그만큼 자신의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권의 책에서 한 페이지씩만 가져다 써도 400페이지 분량의 책을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남의 책을 차용해서 자신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별칭이 따라 붙습니다 이른바 빨판이라는 별칭, 혹은 흡착포라는 별명입니다. 3. 세 번째 이유 (말씀에 대한 변개) 도올은 믿음을 맹신이라고 공격하며 “이해”를 신앙의 절대적 조건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구원의 수단으로 신앙의 절대조건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했고(요 1:12)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하셨으며(요 3:16),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하셨으며(요 5:24),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 6:28,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연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믿음이 없이는 등의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책망하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고 열 두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믿음이 구원의 절대조건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에서 믿음이란 절대적인 것이며 생명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올은 이 믿음을 맹신으로 말하면서 은연중에 무식한 것으로 비하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이해”로 치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도올의 공격과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변개시킨 것이지요. 믿음과 이해는 본질적으로 다른 용어입니다. 이 문제를 확실히 따져 봅시다. 도올이 절대적 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이해”란 철학적 용어로 이성적인 납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인식입니다. 인식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확실히 그렇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차이가 큽니다. 예수님께서 절대적 조건으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터득된 지식의 단계를 넘어서 그 다음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성으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올의 차원은 단순한 이해를 통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차원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했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터득된 지식을 넘어선 다음 단계의 차원을 믿음으로 정의하시고 있습니다. 터득된 지식을 앎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야다(Yada)입니다. 앎이란 구체적인 인식의 경험을 통해 지식된 지식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지식된 지식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못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유대인의 정서는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었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이해와 납득의 과정을 거쳐서는 도저히 믿음으로 연결조차 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은 가버나움(가나), 나사렛, 베다니(예루살렘에서 5리쯤), 예루살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이미 소경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문둥이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과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은 예루살렘까지도 파다하게 전파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기다렸던 것이지요. 예루살렘 입성 때에는 온 백성이 모여서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아 드리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해와 납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와 이해와 믿음의 차이는 같이 갑니다.여기에 더하여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적과 권능을 보았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70인의 전도단으로 파송되어 사역하는 동안에 귀신을 내쫓았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보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믿음이 생산되었고 초절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믿음에는 체험이라는, 경험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더욱 선명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강조한 “믿음”이란 성령의 체험을 근거로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건 데, 만약에 도올선생이 앞으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독교에 관련되어 있는 글을 썼던 것을, 아주 완벽하고 철저하게 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래의 내용의 글을 보면, 도올 선생의 차원이 “이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믿음의 직전 단계인 앎의 단계까지도 들어가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이런 이유로 도올 선생은 기독교에 관한 비판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도올이 발표한 발제문을 인용하겠습니다. 1) “종교는 더 이상 ‘이해 없는 신앙’강요 말라”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2)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 해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3)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 뿐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 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4)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5)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6)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7)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 신념체계와 공존해야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 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8)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9)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10)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11)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 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12)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 하면 안 돼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 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 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 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 있는 신학자와 수준 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 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4. 네 번째 이유- 빨판 신학 도올의 발제문에서는 윤성무와 같은 자유주의적(혹은 혼합주의적) 이단성향의 색채가 짙게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도올이 주장한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라는 대목입니다. 기독교를 샤먼인 토속무교와 한 라인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도올이 기독교인입니까? 유교가 종교입니까? 유교에는 신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가르침이지요. 가르침. 도올이 한 라인선상에 연결시키고 있는 유교, 불교, 토속무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상에게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금기로 강제하고 있는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행위가 오히려 도올에 의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올이 기독교인입니까? 기독교의 아류인 이단까지도 못 갑니다. 이단은 성경을 살짝 왜곡하여 해석하고 그것을 진리로 반포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판정이 되는 것인데요, 도올은 기독교 자체를 유교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속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종교신념체계’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유교의 신념이 삼강오륜이라고 하고 불교의 신념이 자비라고 할 때, 토속무교인 무속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귀신을 잘 모시면 복 받고 귀신을 거스리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이것이 무속신앙의 본질이며 전체입니다. 이것도 신념입니까? 그리고 이런 것도 신념체계로 부릅니까?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귀신 숭배는 미신행위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념이고 체계이고 간에 논리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원시신앙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에서는 주술 외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철학도 정신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념체계와 공존해야 한다니요. 나올 것이 없는데 뭐를 가지고 공존해야 합니까. 참으로 허무맹랑한 주장입니다. 도올은 그의 요한복음 강해에 동원된 참고서적이 총 358권임을 자랑스럽게 몇 페이지에 걸쳐 수록해 놓았습니다. 이를 분야별로 분류해 보면 사전류 50권, 성서류 32권, 주석류 22권, 지도류 5권, 의상류 4권, 희랍 로마의 역사철학류 43권, 희랍예술 기타 미술사류 23권, 한국기독교사 역사류 37권, 중국고전류 6권, 불전관련 9권, Q자료 관련류 6권, 쿰란관련 13권, 도마복음서 관련 8권, 진리복음서관련 2권, 유다복음서관련 2권, 나그 함마디 관련 7권, 영지주의관련 5권, 교회사류 14권, 문헌비평류 7권, 카톨릭 신학류 4권, 기독론류 24권, 신학류 18권, 성서역사류 12권, 잡학류 5 권, 총 358권입니다. 이 책들을 전부 열거하며 요한복음을 기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 신학자는 물론하고 일반인도 안 보는 책들이 상당합니다. 물론 전통교회에서는 이단시하고 있는 책들도 상당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체 이런 책들을 통해 어떻게 건전한 신학연구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책은 자신의 논지가 실려 있기 마련이며 자신의 주장이 뼈대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목적을 가진 연구물이라고 해도 정도는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충분히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남의 책을 베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것과 자신의 것에 참고물을 통해 권위를 더해 주고 논거로 채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학자의 양심 문제입니다. 학자의 양심은 자신의 책이 아니거나 혹은 자신의 주장이 아닌 것을 차용하여 자신의 주장으로 만들어낼 때에는 학자적 양심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남의 책이나 논문 등을 차용하는 차원인 아닌 것입니다. 대개의 뛰어난 학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학문의 고유지번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관찰하고 실험한 결과의 내용을 학문으로 전개하여 연구결과물을 내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자신이 이룬 실험적 결과를 학문으로 내어 놓을 때에 성취감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깊이 연구하고 결론까지 도달한 결과물을 내 놓는 것과 남의 책이나 논문을 줄줄이 열거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학자적 양심은 바로 이런 경우에 적용됩니다. 자신이 관찰하고 고민한 것은 없이 남의 책과 논문을 배껴 낸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독후감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연구한 결과물이 아닌 남의 책으로 자신의 책을 만들어냈다는 양심의 고통 정도는 있어야 학자라고 부를만하지요. 책 전체가 남의 책에서 빌려온 내용으로 채워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책입니까. 편집한 것이지요. 도올이 내 놓은 두 권의 신학관련 서적이 신학서적입니까? 신학이 그리 우스운 학문입니까? 신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한국의 정통신학자의 경우를 소개해 볼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B.A 학위를 취득 후에 신학대학원에서 3년 동안 M.div 과정을 거쳐 졸업하고 M.div 학위를 취득한 후에 Th.M을 2년 동안 하고 Th.M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D.D 과정에 입학하여 논문을 완성하고 나서야 D.D 학위를 받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최소 7년에서 10년은 해야 신학박사 한 분이 탄생합니다. 학문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화 하여 체계화 하여 기술해 놓은 책 혹은 논문을 말합니다. 그 책 혹은 논문의 방향이 어디에 속했느냐에 따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으로 나눠지는 것이지요. 학자가 참고서적의 주장은 채용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막힐 때, 다른 사람은 뭐라고 말했는가? 이것을 살펴보고 반대 혹은 동의의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의 주장을 풀어 나가면서 논거를 더해 줌으로 학문적 권위를 더해주기 위해 채용해야 합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논문을 쓰는 입장과 학문을 하기 위해 논문을 쓰는 입장은 천지차이입니다. BK21 사업의 일환으로 국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일정한 편수의 논문을 쓰기 위해 남의 책이나 논문을 차용하여 그것을 자신의 논리로 채용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학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논문 제조기이지요. 학문을 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논문 혹은 책을 펴내는 것은 자신의 연구에 학문적 가치가 있는 성과물이 나왔을 때 이를 발표하기 위해 출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충분히 연구해 온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도올은 신학서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책을 두 권 써놓고는 한국 교회의 신학자와 수준 높은 목회자가 배출 되어야 한국교회에 생명력이 생길 것이라고 오만을 떨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참고서적을 원용 혹은 인용 혹은 참고를 해서 책을 써내고, 앞에서 소개한대로 자신의 말이 신학의 원류이며,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국의 기독교가 살고, 교회가 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단의 차원도 훌쩍 벗어납니다.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5. 다섯 번째 이유- 오만과 교만 한겨레신문의 종교전문기자인 조연현 기자가 단독 인터뷰를 한 내용을 보면, 도올의 정체성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질의 답변 내용을 보겠습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를 지난 13일 만났다. 그가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을 녹화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교육방송〉 녹화장에서였다. 도올은 100강 가운데 현재 10개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있다. 문: 한국교회언론회가 ‘도올 강의가 드라마처럼 성경을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며 성경을 제자들이 창안해 기록한 것으로 설명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답: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복음서 기자들의 서술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신문기사는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그런 요소가 없다면 사복음서의 내레이션이 왜 모두 다른지를 설명해 보라.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복음서)엔 예수의 사역이 일 년 밖에 안 되고, 예루살렘도 한번 밖에 안 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서엔 예루살렘에 수시로 가고, 3년간의 사역이 나오지 않는가. 문: 그런 주장은 ‘성경엔 일자 일획의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류설’에 배치되지 않은가. 답: 그렇게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 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보라. 한대가 빠져 있다. 문: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의 강의에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답: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구질구질한 신화만으로 어떻게 기독교가 가진 세계적 권위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또 영지주의가 역사에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영지주의는 실체가 없었다. 그것이 ‘발전한 신학’에서 밝힌 바다. 그것은 헬레니즘이 발달한 당대 우주관이었을 뿐이다. 문: 한국교회언론회는 강의 곳곳에서 신학적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답: 누가 과연 오류를 범하는 가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방하면 안 된다. 자신들의 신념만 종교고, 나머지는 이단이라면 거꾸로 보면 자신이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면의 결단이다. 도올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얘기로 신앙이 깨진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들로 벌벌 떠나. 보수교계가 대표자를 정한다면 누가 더 정통적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지 공개 토론을 할 용의가 있다. 문: 기독교에 깽판을 놓는 게 아니라 북돋아 돕고 싶다고 했는데. 답: 나도 환갑이 다됐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정도로 가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기독교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 게 좋다.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게 현명하다. 문: 현재 기독교의 문제를 뭐로 보나? 답: 오직 성전건축에만 매달리는 거다. 건물엔 사람이 차야 은혜가 충만해진다. 사람보다 건물이 커서 썰렁하면 안 된다. 식당이 잘된다고 건물 크게 지은 식당 치고 안 망한 식당 별로 없다. 현재까지 교회 건물이 사람으로 꽉꽉 차는 곳은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없었다면 세계 기독교 자체가 20세기에 별 볼일 없어질 뻔했다. 한국 기독교는 그만큼 위대하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깨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만이 유일한 신앙이라는 독선에서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민중들은 기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신앙을 바르게 갖도록 도와야할 사람들이다. 건전한 상식을 자리잡게 하는게 내 강의의 목적이기도 하다. 문: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단시일 내에 세계가 놀랄만큼 빠르게 정착했다고 보는가 답: 우리나라는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기독교를 유입한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 유학이 가진 공백을 인간 평등으로 메우고, 양반부터 상민까지 뿌리박고 있던 샤머니즘을 기독교가 흡수했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위대하다. 또 우리 민족은 음주가무를 즐긴다. 노래방 봐라. 찬송가가 준 감동이 우리 민족을 기독교에 빨려들게 했다. 문: 세계에서 대표적인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를 직간접으로 섭렵한 도올이 권하는 한국 종교인의 자세는 무엇인가. 답: 자기 신앙은 내면에서 지키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선 관용하고, 모든 사물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문: 그런데 신학대 공부를 왜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는지 답: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를 개인의 힘으로 전환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내가 신학대를 나와서 목사가 되면 나의 카리스마로 인해 엄청난 성도들이 몰리는 대형교회를 만들게 될 것 같아서 미리 그만두었다(웃음). 나는 신학대학을 들어가자마자 큰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인기가 높아 신도들이 많이 생겨났다. 나는 그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결정은 두고두고 후회스럽지 않다. 잘한 일이다. (한겨레,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지금 도올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슨 말일까요?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다는 말과 차라리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게 현명하다"는 말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기독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게 좋다"라는 말은 위협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도올과 타협하지 않으면 도올에 의하여 기독교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일까요. 도올은 기독교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독교 단체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동양학자적 오만함이 뼈골에 사무친 광인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진리를 앞에 두고 저리 오만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것도 자신의 신학은 없고 죄다 남의 신학을 빨판으로 흡수해서 그것을 자신의 책으로 만들어낸 뿌리 없는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